• 그 남자의 눈물 그리고 복지정책 수혜자들
  • 조회수: 443 | 2019.10.28

그는 젊은 흑인 청년이었는데 진료실로 들어서는 얼굴이 아주 심각해 보였다.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성병검사를 하러 온 사람인가 보다 그냥 짐작을 하고 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

"무엇 때문에 오셨나요? 말씀을 하셔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남자는 울기 시작했다.

"흑흑 흑흑….."

'????????'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인터넷 채팅으로 여자를 만났거든요. 흑흑 흑흑……"

"그래서 잠자리를 같이 하셨나요?"

"네……"

"그럼 성병검사를 다 해보기로 하죠. 지금 무슨 증상이 있으세요? 언제 잠자리를 같이 했나요?"

"어제 밤이요. 흑흑 흑흑…."

남자는 계속 울었다.

"자꾸 울지만 마시고요. 말씀을 자세히 해보세요."

"아 글쎄 이 여자가 섹스가 끝나니까 폭탄선언을 하는 것이에요. 자기 에이즈 걸린 여자라고요."

"네에? 어머나, 어떻게 하지? Unprotected sex를 하셨나요?"

"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그 여자를 믿었지. 에이즈에 노출된 후 먹는 약이 있다고 해서 그걸 처방을 받으러 왔습니다. 해주실 수 있는지요?"

"물론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약국 정보는 등록할 때 주셨나요?"

"네, 약 좀 얼른 보내주세요. 부탁합니다. 흑흑 흑흑……."

 

난 에이즈에 노출된 후 먹는 약을 그 남자의 말대로 약국에 보냈고 2주치를 주었으니 그 다음엔 infectious disease doctor 와 follow up 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성병검사 일체를 할 테니 소변과 혈액 샘플을 꼭 주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결과를 2.3일 뒤에 보러 오라고 일러주었다.

남자는 내게 틀림없이 약을 약국에 보냈느냐고 두 번이나 확인을 했다.

한 번은 물어볼 수 있지만 두 번씩이나 확인을 하는 남자가 속으로 약간 이상했지만 환자들이 줄줄이 기다리니 더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다른 환자 때문에 바쁘다가 다시 생각이 나서 그 환자 소변 하고 혈액 샘플을 채취를 했냐고 물으니 환자가 조금 이따 다시 온다 하고 그냥 갔다고 했다.

전화를 해서 오라 해라, 성병검사를 꼭 해야 한다 보조원에게 이르고 계속 일을 했다.

 

일하다가 중간에 또 물으니 환자가 전화를 받아선 곧 오겠다고 걱정 말라고 끊었단다.

알았다고 하고 두 시간쯤 뒤에 환자가 왔느냐 물으니 하도 안 와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 이제 아예 전화도 안 받고 보이스메일로 연결이 된다며 계속 전화연결을 시도해보겠다 했다.

 

남자는 결국 오지 않았다.

성병검사도 다 무료이고 치료도 무료인데 왜 안 왔을까?

혹시 약만 받아 가려고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그럼 그 남자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었나?

내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럴듯한 연기로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니 나는 속으로 많이 불쾌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한국 NP들끼리 모이는 모임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나 자기네들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면서 에이즈 노출 후에 먹는 약이 엄청 비싼데 아마 그 약을 무료로 받아다가 판매를 했을 거라고 하는 소리에 너무나 열을 받았다.

 

그리고 디렉터 닥터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요즘 에이즈에 노출됐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약만 약국에 보내게 하는 사례가 빈번히 보고된다는 것,

약국과 환자가 결탁해서 정부에서 지급하는 약 값을 챙긴다는 소문도 있지만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느니만큼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의심이 가더라도 일단 치료는 시작하고 보라는 요지의 이메일이었다.

 

디렉터의 이메일을 읽고 보니 아무래도 그 남자 환자의 연기와 거짓말에 내가 크게 속은 것 같아서 몹시 언짢았지만 디렉터 말대로 누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 약을 보낼 때 무턱대고 환자 말만 듣고 약부터 보내지는 말자.

검사부터 먼저 하라 해야지.

하지만 그렇다 쳐도 약 값을 챙기려는 나쁜 심보가 피를 뽑고 소변 샘플 주는 것을 뭐 대단하게 여기랴 생각하니 이메일을 읽은 후부터 계속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왜 일을 할 생각을 안 하고 이렇게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살려고 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오후 내내가 지나갔다.

 

NP로 일을 하고 나서 보니 미국 정부에 기대서 의식주 문제, 의료비를 모두 거의 무료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결하고가정 간호 도우미까지 정부에서 붙여주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부지기수로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미국정부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등골이 휘겠다. 참 안됐다. 모두 나 같은 납세자들 돈인 것을 이 팔자 좋은 사람들은 알기나 하려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그들에게는 공통분모로 적용되는 진단명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우울증' 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늘 불안해서 약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약을 달라고 그야말로 아우성을 치는 불안 장애 환자들…..

 

한 번은 의사가 약을 주면서 다시 오라 해서 갔더니 "혹시 우울한 생각이 안 드느냐? 우울증이 그 약 부작용이다" 해서 까르륵 넘어가면서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했더니 의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우울증도 시간이 있어야 걸릴 것 같아요. 눈 뜨면 달려야 하는데 우울증에 내어 줄 시간이 없습니다.'

 

노력을 안 해도 몸을 안 움직이고도 편히 먹고사는 인생들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무척 편해 보이는 인생들이지만 삶의 목표가 없으니 사는 재미도 없고 얼굴은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표정으로 사는 사람들, 자기는 무가치하고 자기가 싫고 가끔은 죽고 싶은 생각도 한다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나름대로 내리고 싶은 처방과 치료가 있다.

 

"직장을 구해서 일을 하시게 되면 다 낫는 병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일단 일을 시작해 보시지요…. 무료 직업교육도 많이 시켜주니 한번 알아보세요."

 

일전에 세미나에서 마취과 닥터로 70세에 은퇴하신 한국 의사를 만났는데 이분은 골프가 취미셨다.

일할 때는 주말에 치는 골프가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는데 은퇴 후에 매일 치러가니 재미가 하나도 없고 지루하기만 하다 하셨다.

날 보고는 절대로 미리 일은 그만두지 말라, 다들 3개월 놀면 지루해서 몸을 뒤틀다가 개중에는 이분한테 파트타임 자리라도 구해달라고 오는 의사들이 많다고 하셨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나도 일하다가 휴가 스케줄이 다가오면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지….

휴가 동안 뭘 할까?

별 계획이 없이 그냥 집에서 쉬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아주 즐겁고 행복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출근하러 일찍 일어나기 싫을 때 오프데이를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운지.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매일 놀면 이렇게 오프 날이 주는 즐거움 같은 것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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