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뚱한 얼굴로 웃는 일이 거의 없어서 좀 불편하던 사무원이 갑자기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닥터가 없는 동안 그녀가 내게 무례하게 굴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닥터P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서 그녀가 힘들게 하지는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하도 뚱하고 아무말도 안해서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무엇을 해달라고 할 때는 아주 공손하게 부탁하였다. 내 맘에 안든다고 해도 그녀가 없으면 내가 당장 훨씬 더 불편할 테니까, 또 말을 많이 시켜서 바쁜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퇴근할 때면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휴가에서 돌아온 닥터는 내가 본 환자들 챠트는 따로 챙겨 놓은 것을 보고 환자들이 많이 왔다갔다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문제가 없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하다가 잘 모르면 우리 병원 의사들에게 물어 봤어요." 그녀는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닥터가 휴가에서 돌아온 것을 아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그래도 한달동안 혼자 환자 본 경력이 붙어서인지 나는 환자보는 속도가 좀 빨라졌다. 그래도 환자가 너무 밀려있는 데다가 닥터는 보험회사와 중요하게 통화할 일이 있다면서 전화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당연히 환자들은 모두 내 차지. 내가 일단 환자를 보고 진료노트도 써놓고 그냥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의사를 보고싶은 사람은 보고 가라고 하였다. 약속도 없이 그냥 온 한 환자는 병가를 일년 받았는데 연장 한다는 서류를 써달라기에 의사에게 말씀하시라고 나는 빠졌는데 환자 나이가 73세 였다. "왜 퇴직을 하시지 병가를 연장 하시나요?" 하고 묻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점심도 제대로 못먹고 바빠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바빠도 점심은 먹고하지 의사는 밥도 제대로 못먹네." 늘 안쓰러웠는데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보니 나도 점심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시간을 보니 4시가 넘었다. 애들도 아닌데 조금씩 자주 먹어야하는 나는 12시에 샌드위치를 하나 미리감치 먹었는 데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오래 기다린 환자가 눈에 들어 왔다. 할 수 없이 들어오시라고 했더니 아주 떫은 표정으로 "나는 의사 보러 왔어요." 하고 약간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싫다고? 누가 떠나? 정말 고맙네요." 라고 하며, "의사를 보시려면 좀 기다리셔야 됩니다." 환자에게 말을 하고 닥터에게는 "저 환자는 꼭 당신을 만나겠대요."하고 신이나서 아직도 전화를 하고 있는 의사에게 전했다. "잘 됐다. 고맙기도 하지. 밥 먹어야지."
내 오피스로 와서 문을 꼭 닫고 스낵으로 가져온 빵과 커피 그리고 귤을 먹는데 내 배가 불러서 살만 하니까 아직도 아무것도 못 먹은 의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늦게 점심을 먹으려니 학생시절 일이 떠올라서 나는 혼자 웃었다. 학생 때, 선생님 닥터 발레리를 따라서 회진을 돌다보면 점심은 빨라야 두시가 넘었고 환자들 중에는 선생님을 붙잡고 30 분이상 사설을 늘어 놓는 환자들이 2-3분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들 때문에 회진이 너무나 늦게 끝나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나 싫었다. 가끔씩 그 환자들이 잠들어 있기도 했는 데 나는 진을 30분 이상 빼는 환자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크게 횡재를 한 느낌이 들었다. "환자 자네요. 그냥 지나가요." 하고 너무나 속이 보이는 말을 하면서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의사 중의 의사 닥터 발레리는 그 환자들을 일일이 다 깨웠다. 그리고는 또 30분 붙들려 있어서 나는 좀 짜증스럽게 "왜 자는 환자를 깨우세요? 나중에 치료 끝나고 의사에게 볼일 있으면 오라고 하지요." 했더니 그 환자들이 자기네가 자고 있으면 깨워 달라고 했단다.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나는요, 나중에 NP되도 환자들한테 선생님 처럼 해 줄 자신도 없고 그렇게 해주지도 않을 거에요. 환자들이 어떻게 바쁜 의사를 30분씩이나 세워 놓고 medical problem 도 아닌 신세 타령을 하느냐고요?" 하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한번은 회진을 따라 다니다 하도 배가 고프고 피곤하여 선생님 오피스로 와서는 비상 식량인 쵸코렛(나는 쵸코렛을 싫어한다. 살이 찌는 음식이니까)을 몇개 먹고 나갔는데 너무 서둘러서 먹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점심을 먹고 거울을 보니 입가에 쵸코렛이 약간 묻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어, 난 몰라. 이게 웬 망신인고? 나는 살짝 먹고 나간다고 먹었는데.. 나 쵸코렛 몰래 먹고 왔어요." 하고 선생님 앞에서 광고를 한 격이 됐으니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하였다. 뭐 묻었다고 가르쳐 주고 싶어도 내가 민망해 할까봐 선생님은 아무말도 안하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배가 고프고 피곤해 하면서 흔들거리기라도 하면 눈치를 챈 선생님이 가서 먼저 점심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동방예의지국 출신인 내가 그럴수는 없다고 꾹 참고는 했는 데……….
아, 이렇게 들통이 나다니……..
가끔씩 선생님은 중환자실 로테이션을 하는 fellow doctor들을 teaching하거나 presentation 등 다른 스케줄이 끼어 있기도 했는데 그런날 스케줄은 더 빡빡하였고, 선생님 스케줄에서 점심시간은 언제나 빠졌다. 그런 날 선생님의 스케줄을 듣고나서 나는 언제나 한가지 질문만 하였다.
"그럼 점심은 언제 먹나요?"
지금은 나도 웃음이 나지만 그때 는 상당히 심각한 질문이었다.
이렇게 환자에게 잘하는 분에게서 트레이닝을 받아서 인지 나는 내가 생각해도 환자들에게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고 여러번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보고 배우지 듣고 배우지 않는다니까.
닥터가 내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100점이라고 하면서 환하게 웃어서 나는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환자 대하는 공손한 태도는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언제나 환자에게 공손하시잖아요. 닥터가 내가 환자 대하는 태도가 100 점이래요. 선생님 덕분에 NP 자리 구했어요." 내 말에 선생님은 몹시 쑥스러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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