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모든 보조원 중에서 유일한 LPN이라고 했다. LPN은 일년 과정으로 RN이 되려면 3년을 더 공부해야 한다고 내가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서 좀 잘난척을 한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었는데 그날은 자기보다 훨씬 공부도 많이 하고 임상 경력도 많은 내게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처럼 환자를 보고 이것 저것 오더를 내는 내가 영- 못마땅 했던지 정식으로 내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녀는 이미 등도 굽어있고 또 손가락도 관절염이 심해 보여서 나보다 나이가 많이 많은가 보다 생각했는 데 뜻밖에도 나보다 많이 어린 사람이어서 속으로 약간 놀랐었다.
그녀는 이 날 말고도 환자를 보려고 내가 챠트를 챙기면 그 사람은 의사를 보러 온 사람이라고 챠트를 놔 두라는 식으로 기회가 될때마다 옆에서 잔소리를 하여서 “의사 보러 온 사람은 내가 보는 거거든요.” 하고 그냥 무시해 버리곤 했었다. 그 날 그녀는 환자가 다른 의사에게서 받아 온 서류를 읽고 또 그것을 써주어야 했는데 이게 뭐냐고 하도 투덜 거려서 내가 슬쩍보니 스펠링이 하나 틀린 고혈압 약이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스펠링이 A가 아니라 O가 맞고 그 약은 고혈압 약이라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하면서 책을 찾아 보겠다고 했다. 그 태도가 네가 뭘 알겠느냐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공연히 시간 낭비를 하는 그녀가 안됐어서 내 말이 맞으니까 안 찾아봐도 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화를 버럭 내면서 글씨를 알아 볼 수 없게 썼다면서 약 사전을 계속해서 뒤적였다. 하지만 스펠링이 틀렸으니 못찾는 것은 당연한 일, 다른 보조원들은 내게 뭘 물어서 내가 대답을 해주면 그러냐고 고맙다고 하는데 그녀는 자기가 오피스에서 유일한 LPN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내 말을 믿지 않고 계속 이게 뭐냐고 혼자 짜증을 내며 화를 내기에 나는 그냥 환자를 보러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보니 의지가 굳은 사람인지 아직도 그게 뭐냐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웃으면서 의사에게 “왜 저 사람은 내 말을 안 믿느냐, 내가 스펠링이 틀렸다고 했는데 안 믿고 저런다.” 고 했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직도 그것과 씨름을 하는 그녀를 본 의사는 스펠링이 하나 틀린 고혈압 약이라고 나와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왜 그런 걸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녀: (언성을 높여서) 정확하게 하려고 그래요. 뭐가 나빠요?
의사: 시간 낭비를 하고 있잖아요? 정확하게 하려는 게 아니고 시간 낭비에요. 시간낭비.
그녀: (사람들에게 서류를 보여 주며) 이것 좀 읽어 봐요. 이걸 누가 O로 읽어요? 이런 글씨체를 누가 알아 보느냐고요?
나는 별것 아닌 걸로 의사 말대로 시간을 낭비하면서 화는 화대로 내는 그녀가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서 나와 얘기를 많이 하는 보조원에게 “저 사람 원래 좀 저래요?” 하고 슬쩍 물으니 말도 말라면서 자기는 실수도 안하고 다 아는 줄로 착각을 해서 가끔은 의사와도 언쟁을 한다고 하면서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아무리 자기가 많이 안다고 해도 어떻게 고등학교 나와서 일년 LPN 학교 다닌 자기가 의대를 다니고 의사라는 타이틀을 달려고 10년이상 공부를 한뒤에 또 임상 경력이 30년 가까이 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이 사람은 좀 연구를 해 봐야하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생각 하였다.
내가 미국에 와서 크게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정말 겸손 하다는 것, 나는 공부를 하기 전에는 내가 그토록 정말 내 친구 말처럼 “무식이 튀기는 사람”인줄 조차 알지도 못하고 살았는 데 공부를 조금 해 보니 “참 무식하게 살았군요.” 하는 생각이 얼마나 크게 피부에 와 닿는지 어떨 때는 공부를 하다가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공부를 안하면 이런 느낌으로 혼자 화를 낼 일도 없을테니 사는데 지장도 없는데 그만 두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하고 갈등도 했었다. 그러나 무식한 자신의 실체를 일단 파악하고 나니 이 무식한 채로 산다는 것은 더 큰 갈등만 일으키고 더 자존심 상하는 일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무식하게 사느니 이미 시작한 이 공부를 끝내면 이 무식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위로 하면서 마음을 추스리기도 했었는데 다른 NP와 얘기를 하다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 왈 “NP되는 공부 하기 전에는 나도 내가 뭘 좀 아는 간호사로 착각하고 살았는 데 공부하다 보니까 세상에 모르는 게 너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있지요. 공부 하면서 자존심 상해서 혼났어요.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얼마나 무식한 사람이었는지 자꾸 깨달아 지는 것 있지요.” “ 어머,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 데 당신도 그랬군요.” 이런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한국 속담에 벼가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나는 미국에 와서 일하면서 그 말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진리라는 것을 여러번 느꼈다. 내가 같이 일하면서 좋아하는 의사들은 다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리병원 수련의나 전문의가 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겸손 하였다. 그들이 탁월하게 똑똑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겸손한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아서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2년 반을 간호사로 근무한 나는 불행히도(?) 의사가 환자들 앞에서나 간호사들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 한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해서인지 '미국 의학은 따라 잡으려고 하면서 왜 미국 의사들이 환자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지는 배우려 하지 않을까? 미국 의대에서는 환자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고 가르치나봐, 한국 의대는 그런 것 안 가르치나?' 혼자 곰곰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우리 병원은 2001년 부터 간호과 주최로 " physician of the year " 라는 상을 제정해 놓고 우수한 의사들에게 상을 주는 데 이 상은 간호사들이 의사를 추천해서 추천서와 함께 위원회에 제출하면 거기서 수상자를 결정하는 상인데, 의사들 사이에선 큰 영예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의사가 받는 상을 간호사들에게 수상자를 결정할 기회를 주는 것을 보고 나는 누군지 머리가 참 좋은 사람이 이 추천 방식을 도입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간호사는 의사를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다 볼 수 있으니까 의사를 가장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평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한가? 이 상이 처음 제정 되었을 때 나는 나중에 내 임상 실습 지도교수가 되신 닥터 발레리를 언제나 참 훌륭한 의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 분을 주저 없이 추천을 하고 지금보다 훨씬 형편 없던 영작 실력으로 추천서까지 첨부해서 제출을 했었다. 우리 과 간호사 모두 그 분을 추천하자는 데는 이의가 없었지만, 추천서가 많이 들어갈 수록 수상 확률이 높아지는데도 나와 또 다른 필리핀 간호사 말고는 아무도 추천서를 쓰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그녀들이 쓰면 더 잘 쓸텐데 속으로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영어 엣세이 콘테스트가 아닌 만큼 내가 느낀대로 그 분에 대해서 써서 제출을 했는데 고맙게도 닥터 발레리가 당당하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닥터 발레리가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많이 기쁘면서도 영어 엣세이 콘테스트가 아닌데 뭘, 했던 때와는 달리 약간 걱정이 되었다. 어, 내가 쓴 추천서 심사 위원들이 다 읽었을텐데 어떻게 하지? (읽어보라고 쓰고 왜 그래?) 내 영어 실력 들통 났잖아요? 영어가 엉성 했을텐데요? 하고 쑥스러워 하니까 수간호사가 어쨌던 당신이 쓴 추천서를 읽고 닥터 발레리가 수상하게 되었으니 그러면 됐지 않았느냐고 위로해 주셨다. 친한 미국 엄마(이 엄마도 간호사)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썼다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훌륭한 의사냐면서 나 보고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주위에서 참 똑똑한데 겸손은 커녕 교만하게 행동하는 몇 의사를 보는데 그네들은 늘 간호사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럴때 마다 저 똑똑한 사람이 겸손하면 인기짱 일텐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중환자실 간호사와 그 중의 한명인 의사 이야기가 나와서 얘기를 하는데 그녀가 한 말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내가 가끔 병원 교회에 기도 하러 가보면 그 사람이 항상 와 있어. 저사람은 사람들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면서 무슨 기도를 하나 정말 궁굼해……”
하루는 보조원 한명이 내게 웃으면서 한마디 해 주었다. “난 당신이 오는 날은 아주 좋아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녀서요. 그리고 당신은 너무 나이스 해요.”
“주위 사람들을 당신이 대접 받고 싶은 대로 잘 대접해 주세요.” 이 말은 살면서 많이 들었는 데 내가 미국에 오래 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훨씬 더 많이 들은 것 같았다. 아무리 상대방이 하는 일이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가 그 일을 더 해야 하는 법. 서로를 존중해 주면서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이라 평범한 대인 관계 법칙을 그 LPN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English for healthcare professionals 에는 의학영어 회화뿐 아니라 ......카더라 통신이 아닌 미국에서 간호사 로 근무하는 저자가 쓴 미국 간호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수록 되어 있습니다. 책 구입을 원하면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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